창30:17~21 | 김상욱 | 2021-08-0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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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론 오늘 드디어 창세기30장 마지막 시간입니다. 레아가 자기 자식들의 이름을 작명하는 모습을 통해서 그녀의 신앙이 어땠는지에 대한 말씀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2. 본론: 자식의 작명을 통해 드러나는 레아의 신앙 지난 시간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많은 여인들(사라, 리브가, 한나, 마노아, 엘리사벳 등)이 임신하지 못했다가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로 말미암아 기도의 응답으로 임신을 하게 된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이 여인들은 모두 남편의 사랑을 받은 자들이었습니다. 이에 반해, 레아는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했던 여인이었습니다. 아이가 태어나자 레아가 아들의 이름을 짓습니다. 첫째 아들의 이름이 르우벤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다”라는 뜻이지요. 남편에게 받지 못했던 위로를 하나님께로부터 경험한 것입니다. 창29:31에 보면 “여호와께서 레아가 사랑받지 못함을 보시고”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그녀의 아픔을 보셨습니다. 야곱을 변화시켜서 레아를 돌보신 것이 아니라, 당신이 직접 레아를 돌보셔서 그녀를 변화시키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돌보시는 은혜를 경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둘째 아들의 이름은 시므온입니다. 그 의미는 “여호와께서 나의 사랑받지 못함을 들으셨다”라는 뜻입니다. 르우벤이 태어났지만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야곱은 여전히 레아를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이 ‘들으셨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아마 야곱과 라헬을 통해 마음의 상처를 받고 울부짖는 레아의 소리를 들으셨을 겁니다. 그런 레아에게 하나님은 긍휼을 베푸셔서 다시 임신하셨습니다. 자, 이제 셋째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쯤되자 레아는 남편이 달라질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내 남편이 나와 연합하리로다”라는 뜻을 가진 레위라고 셋째 아들을 작명합니다. 레아의 신앙이 자식들의 작명 속에 지금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넷째 아들 유다는 어떤 뜻입니까? “내가 이제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라는 뜻입니다. 이제 레아는 자신의 소망이 어디로부터 오는지 드디어 깨달았습니다. 이제는 남편이 아니라 하나님만 바라며 소망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다섯째 아들이 태어나자 ‘잇사갈’이라고 작명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내게 값을 주셨다”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값’이라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레아의 값은 야곱의 첫째 부인으로써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입니다. 아직 야곱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데 하나님께로부터 이미 그 값을 받았다고 믿는 것입니다. 마지막 여섯째 아들, 스불론의 이름의 뜻이 무엇입니까? “이제는 그가 나와 함께 살리라” 여기서 ‘그’는 야곱입니다. 여기서도 야곱이 자기와 함께 살게 되리라고 단정하고 있습니다. 창49장에 보면 야곱이 그의 열두 아들들에게 유언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리고 31절에 보면 야곱이 자식들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가 거기 장사 되었고 ... 나도 레아를 그곳에 장사하였노라” 여기서 그곳은 막벨라 굴입니다. 그곳에는 아브라함과 사라, 이삭과 리브가가 묻혀 있습니다. 바로 그 조상의 묘실에 야곱은 자신이 사랑했던 여인 라헬이 아니라 레아를 그곳에 묻습니다. 바로 “이제는 그가 나와 함께 살리라”는 레아의 믿음이 이루진 것입니다.
3. 적용 및 결론: 하나님은 레아의 중심을 보셨습니다. 사람이 보는 기준과 하나님이 보시는 기준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레아의 신앙적인 마음과 자세와 그의 중심을 보시고 역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외모로 보고 평가하시거나 역사하시니 않습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신앙적인 자세와 중심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마음의 중심이 레아와 같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은 약한자를 도우십니다. 그러나 단지 약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도우시는 것이 아니라 그 중심이 하나님 앞에 “불쌍히 여김을 받을 만한 마음”이 될 때 그분이 역사하십니다. 하나님께 불쌍히 여김을 받는 성도들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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